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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조선 무관 노상추의 일기가 보여준 진짜 조선

by 차차파파라바 2026. 11. 3.

역사는 왕의 이름과 전쟁의 날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밥값이 얼마였는지, 과거를 보러 한양까지 며칠을 걸었는지, 관직을 얻지 못해 몇 년을 기다렸는지 같은 일상의 기록이 쌓여야 비로소 한 시대의 얼굴이 보입니다. 조선 후기의 무관 노상추가 남긴 일기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자료입니다. 무려 68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쓰인 이 일기 속에는 한 남자의 출세와 좌절, 그리고 그가 살았던 사회의 속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이 긴 일기를 따라가며, 교과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조선 후기의 진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문관을 꿈꿨지만 무관의 길을 걸어야 했던 한 남자의 삶이, 그 시대의 당쟁과 신분, 경제를 어떻게 비추는지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한눈에 보는 노상추와 그의 일기

항목내용
인물노상추(1746~1829), 경북 선산 출신의 조선 후기 무관
일기 기간1763년부터 사망 직전까지 약 68년, 2만 5천 일에 가까움
기록 방식1년 분량을 한 권으로 묶고 그해의 간지로 제목을 붙임
관직1780년 무과 급제, 선전관을 거쳐 정조 때 삭주 부사까지 오름
일기의 가치당쟁·과거·농사·소송까지 조선 후기 사회상을 생생하게 전함

17살, 아버지의 뜻으로 시작된 기록

노상추는 1746년 영조 때 태어나 1829년 순조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의 안강 노씨로, 문과 급제자도 있었지만 무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노정(주걸공)은 병마절도사까지 지내며 영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무장이었습니다.

일기를 쓰게 된 계기는 가슴 아픈 가족사였습니다.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모든 일에 관심을 끊고 자신이 써 오던 집안 일기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17살에 시작된 기록은 그렇게 68년이라는 긴 세월로 이어졌습니다. 첫 일기는 남아 있지 않지만, 1763년부터의 일기는 18살 무렵부터 하루도 거의 빠짐없이 이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왜 68년 일기가 특별한가
왕이나 대문호의 기록이 아니라, 지방 양반 출신 무관 한 사람의 일상 기록이 68년치로 온전히 남았다는 점이 드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집 안팎의 세세한 살림살이, 쓴 사람의 소회까지 적혀 있어 조선 후기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문관을 꿈꿨지만,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노상추는 처음부터 무관을 꿈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뜻을 품고 문관의 길을 바랐지만, 영남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은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이었지만, 그만큼 당쟁이 치열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과 급제는 공부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중심에 들어 있지 않으면 문턱을 넘기 어려운 구조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도 문관이 맡았고, 그 기록 속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주로 등장했습니다. 무관은 상대적으로 외면받았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무과 합격자를 너무 많이 뽑으면서 무관의 위상은 더 떨어졌습니다. 숙종 때에는 한 번에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무과에 급제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순신 같은 인물도 전쟁이 없었다면 잊혔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노상추 역시 무관에 대한 세상의 평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옛 유학자들이 무인을 천하고 비루하다고 칭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무과의 길을 택한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고, 하루라도 빨리 과거에 급제해 가문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길의 대가 — 14년, 그리고 집안의 전 재산

선산에서 한양까지는 220km에 달하는 거리였습니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노상추는 1780년 1월 고향집을 출발해 꼬박 일주일을 걸어 한양에 닿았습니다. 가난한 선비가 도포까지 팔아 노잣돈을 마련했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로, 과거길은 돈이 많이 드는 여정이었습니다. 본인에 더해 말과 노비 한두 명을 대동하면 먹고 자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일기에는 10년 과거 준비에 논 아홉 마지기, 밭 90마지기, 돈 50명이 모두 들어갔다는 탄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이르는 규모라는 추산도 있습니다. 과거 급제는 양반에게 신분 상승이자 가문의 명예였지만, 그 대가는 집안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몇십 년을 과거 준비만 하다가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상추는 23살부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을 오가기 시작했고, 32살에 첫 시험을 치른 뒤 35살이던 1780년에 마침내 무과에 급제했습니다. 합격자 발표에서 자기 이름을 확인한 순간, 25년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주걸공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문과 급제자에게 주는 백패 대신 무과 급제자에게 주는 홍패였지만, 10년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합격이 끝이 아니었다 — 관직을 얻기까지 4년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무과 합격자가 워낙 많았기에, 합격자 모두에게 관직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선전관은 서반 최고의 청요직으로, 선배 선전관들이 직접 함께 일할 후배를 뽑는 천거 방식이었습니다. 가문이 좋지 않으면 들어가기 어려웠고, 노상추는 선전관 추천을 기다리며 소식이 오지 않자 한양을 수시로 오가며 무관 자리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여기에도 당파가 작용했습니다. 노상추의 집안이 영남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소를 쓴 이력이 문제가 되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급제 후 4년이 지나서야 그는 선전관에 들 수 있었습니다. 39살에 금군으로 입직한 뒤에도 중앙과 지방의 말단 무관직을 전전했고,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갑산의 동변장 같은 직책을 받자 자신의 세력이 없어 쫓겨나는 것이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병호소회 등록에는 당시 무관들의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사 적체, 일거수일투족의 차별, 세력이 없어서 받는 멸시 같은 내용입니다. 노상추도 틈틈이 활쏘기를 연습하며 기회를 노렸고, 마침내 인생을 바꾼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정조의 눈에 띄다 — 삭주 부사로의 초고속 승진

1793년 가을, 군영에서 실시한 활쏘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노상추를 정조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영조가 신뢰했던 노정의 손자라는 사실에 정조는 무척 반가워했고, 병조판서에게 당상 선전관 자리를 더 늘려 추천하라는 하교를 내렸습니다. 하급 관리였던 노상추에게 정조는 파격적으로 정3품 삭주 부사직을 내렸습니다. 그가 그토록 꿈꿨던 정3품 지방 수령직보다 더 높은 자리였습니다.

정조가 노상추를 중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늘 시해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무예에 능하고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과의 인연도 이때 맺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지방을 돌보는 일을 상의하는 내용과, 노상추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묘갈명을 써 달라는 부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변방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지방관 대부분이 노론이라 사사건건 대립했고, 노상추가 잡아들인 범인을 태천군수가 풀어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1년 만에 근무 평정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파직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초고속 승진도, 파직도 모두 치열한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 때문이었습니다. 군사 훈련보다 당파 싸움이 더 고달픈 변방 생활이었던 셈입니다.

일기 속 조선의 일상 — 농사, 소송, 그리고 몰락

노상추 일기의 또 다른 매력은 관직 이야기 너머의 일상입니다. 낙동강 상류의 선산 지역은 홍수와 가뭄이 잦아 반농반어의 삶을 살았고, 일기에는 언제 무엇을 심고 언제 추수하며 수확량은 얼마이고 시세는 어떤지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농업 경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송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 후기 소송의 80~90%가 산송, 즉 산소와 묘역 다툼이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대부들이 풍수에 입각해 묘역을 넓혀 가면서 분쟁이 잦아졌고, 법이 오히려 빌미를 제공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묘역 기준이 없던 하층민이 양반의 묘역을 침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신분의 경계가 흔들리던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비 숫자는 줄어들고 부유한 평민이 늘어나던 시기, 아무리 권세가 대단한 양반이라도 가게 경영이나 세상 변화에 무심하면 쉽게 몰락했습니다. 그 예로 일기 말미에는 낙학파 성리학자 조병덕의 이야기가 대비됩니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세가 기울어 남쪽으로 이주했고, 농사나 이재에 밝지 못해 결국 책까지 팔아야 할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1,700여 통의 편지에 막막한 사연이 가득합니다.

이에 비해 노상추는 향촌 양반으로서 농사를 짓고 가게를 경영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양반이었습니다. 제사와 조상의 무덤 돌보기, 가문 모임이 그의 일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자신이 지켜온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후손들도 양반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며 가문을 빛내 주길 바랐습니다.

오늘날의 의미 — 기록이 역사가 되는 법

노상추의 일기 쓰기는 사망 직전까지 계속됐습니다. 84세의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문안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할 만큼 일기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남들이 비루하다고 폄하하던 무인이었지만, 그는 충실히 그 길을 걸었습니다. 차남이었지만 장남 대신 가게를 꾸려 나갔고,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일기 덕분에 우리는 노상추 개인의 삶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사건과 연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남기는 기록도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한 시대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거창한 업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루의 일상을 꾸준히 적는 일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역사 남기기가 아닐까요.

마무리

68년의 일기는 한 남자의 야망과 도전,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문관을 꿈꿨지만 무관이 되었고, 합격했지만 관직을 얻지 못했고,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당쟁에 밀려 파직됐습니다. 그럼에도 노상추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록이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닿은 것은, 결국 꾸준함이 만든 기적입니다. 조선 후기를 이해하고 싶다면, 왕의 실록 옆에 이 무관의 일기를 함께 펼쳐 보시길 권합니다.

Q&A

Q. 노상추는 누구인가요?

A. 1746년에 태어나 1829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후기의 무관입니다. 경북 선산 출신으로, 1780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과 삭주 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Q. 일기를 얼마나 오래 썼나요?

A. 17살에 시작해 사망 직전까지 약 68년, 날짜로는 2만 5천 일에 가깝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썼습니다. 1년 분량을 한 권으로 묶어 그해 간지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Q. 문관을 꿈꿨는데 왜 무관이 되었나요?

A. 영남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문과 급제의 문턱이 높았고,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하루라도 빨리 급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과는 문과보다 진입이 쉬웠지만 사회적 평판은 낮았습니다.

Q. 과거 준비에 얼마나 들었나요?

A. 일기에는 10년 준비에 논 아홉 마지기, 밭 90마지기, 돈 50명이 모두 들어갔다는 탄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는 수억 원 규모라는 추산도 있습니다.

Q. 이 일기가 오늘날 왜 중요한가요?

A. 왕이나 대문호가 아닌 한 지방 무관의 일상 기록이 68년치로 남아, 당쟁·과거·농사·소송 등 조선 후기 사회상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